Writing

결국, 하나를 제대로 쓰기로 했다

OpenRouter로 온갖 모델을 꽂아보고, Kimi Code에 코딩 플랜까지 결제하고, 한 달 치 사용량만 8억 토큰을 넘겼다. 몇 달을 굴러다닌 끝에 깨달은 건, 문제가 도구가 아니라 매일 다시 고르는 일 자체였다는 것이다.

갈아탈 도구를 찾는 데 몇 달을 쏟았지만, 정작 답은 갈아타지 않는 쪽에 있었다.

임양성 · 2026년 7월 · AI · 일상의 단상


화요일 아침, 새 터미널을 열어놓고 잠깐 멈췄다. 오늘은 뭐로 일하지. 어제도 이 자리에서 똑같이 멈췄던 게 떠올랐다. 그제도 그랬다. 나는 매일 아침, 어떤 AI 도구로 하루를 시작할지를 처음부터 다시 고르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 결정은 매번 뒤집혔다. 어제는 이게 맞다고 확신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 스스로도 내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도구가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몇 달을 굴렀다

돌아보면 지난 몇 달은 갈아타기의 연속이었다.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OpenRouter에 카드를 등록해두고 이 모델 저 모델을 꽂아봤다. DeepSeek을 붙였다가, 새로 나온 모델이 좋다는 소리가 들리면 또 갈아 끼웠다. OpenCode에 그 모델들을 물려 돌려보고, Gemini도 붙여보겠다고 OAuth 로그인과 씨름했다. 모델을 바꿀 때마다 크고 작은 에러가 났고, 나는 그걸 잡느라 또 반나절씩을 흘려보냈다.

Kimi Code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치만 한 게 아니라 코딩 플랜까지 결제했다. 크레딧 구조와 가격을 표로 비교하고, Hermes에 연동해보려다 안 돼서 또 한참을 매달렸다. 며칠 신나게 써봤지만, 이 녀석이 내 지식 저장소 여기저기에 엉뚱한 폴더와 파일을 만들어놓기 시작했다. 정리하는 데 든 시간을 생각하니 결국 접었다. 결제한 요금이 아까웠지만, 그게 갈아타기의 비용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지금은 그때 만들어진 파일 일부를 지워버려서, 내가 거기에 정확히 얼마를 쏟았는지조차 다시 세기 어렵다.

그 사이 "주력 모델을 뭘로 둘 것인가"를 며칠 간격으로 혼자 다시 고민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동안은 Hermes를 중심에 세웠다. 여러 에이전트를 뒤에서 지휘하는 오케스트레이터로 두고, 텔레그램 봇까지 붙여 매일 브리핑을 받았다. 회사가 열어준 구독으로 Codex를 쓰고, 개인 구독으로 Claude Code를 쓰고, 원격 접속용으로 OpenCode를 남겨뒀다.

급기야 나는 한 달 사용량을 토큰 단위로 집계하는 리포트까지 만들었다. 딱 30일 치를 뽑았는데 8억 5천만 토큰, 같은 양을 단일 API로 환산하면 약 2,182달러가 나왔다. 그것도 겨우 한 달 치였다. 로그에 남은 세션만 세어도 Claude로 180번, Codex로 60번, Hermes로 100번을 넘겼고, 이런 달이 몇 달을 이어졌으니 실제로 흘려보낸 양은 그 몇 배였다 — 그마저도 지워지거나 30일이 지나 사라진 기록은 뺀 것이다. 그 숫자를 보고도 나는 "더 싼 모델로 갈아타면 얼마가 굳지?" 하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모든 실험에는 저마다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이면 나는 다시 처음의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잘못된 질문

한참 뒤에야 내가 매일 던지던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보였다. "어느 도구가 나를 세션 너머까지 가장 잘 기억해주는가."

밤마다 나는 내 맥락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이 도구의 기억, 저 도구의 세션, 그 사이 어딘가에 오늘 한 일이 남는데, 내일 다른 걸 열면 그게 이어질까. Hermes가 자기 데이터베이스에 세션을 저장해 대화를 이어준다고 했을 때 솔깃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나는 "기억을 가장 잘 이어주는 도구"를 찾아 헤맸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가 틀린 전제 위에 서 있었다.


기억하는 건 도구가 아니었다

내 모든 일과 생각은 결국 평범한 텍스트 파일에 저장된다. 업무 문서든 개인 프로젝트든, 특별한 앱이 없어도 파일만 열면 그대로 읽힌다. Obsidian으로 보든 메모장으로 보든, 어떤 도구로 열든 읽는 내용은 똑같다.

그 순간 질문이 통째로 녹아 사라졌다. 기억하는 주체는 도구가 아니라 그 파일 더미였다. Claude든 Codex든 Hermes든, 결국 같은 폴더를 읽고 쓰는 서로 다른 손일 뿐이었다. 어느 손이 세션을 넘어 더 잘 기억하느냐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기억은 손에 있지 않았으니까. Hermes의 세션 데이터베이스는 사실 그 파일 더미의 희미한 복사본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다른 PC로는 넘어가지도 못했다.

이건 며칠 더 써본다고 명확해질 문제가 아니었다. 더 써서 알아낼 게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던 걸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내가 붙잡고 있던 건 판단이 아니라 망설임이었다.


고르지 않기로 한 것

그래서 규칙을 하나 못 박았다. 메인은 Claude Code 하나로 고정한다.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검토하고 고치는 일은 전부 거기서 한다 — 사용량 리포트를 다시 봐도 내가 제일 깊게, 제일 많이 쓴 게 결국 그거였다. Codex는 취향으로 고르지 않고 아주 분명한 조건일 때만 켠다. Claude의 5시간 사용량이 바닥났거나, 회사 계정으로만 닿는 데이터를 읽어야 하거나, 대량으로 코드를 찍어내야 할 때. 나머지는 접었다. Hermes는 아주 새로운 모델이 나왔을 때 OpenRouter로 잠깐 찍먹해보는 자리로만 남겼다.

이 결정의 핵심은 어떤 도구가 이겼느냐가 아니다. 아무것도 벤치마크에서 이기지 않았다. 나는 그냥, 매일 아침 그 결정을 다시 열지 않기로 한 것뿐이다.


돌아보면 진짜 결정은 도구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그 선택을 매일 다시 하지 않기로 정하는 일이었다. 좋은 도구를 찾는 데 쓴 시간보다,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을 계속 다시 여는 데 쓴 시간이 훨씬 많았다. 결제한 요금제도, 밤마다 두드린 계산기도, 결국은 그 망설임의 값이었다. 이제는 안다 — 갈아탈 도구를 찾는 것보다,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정리하는 게 먼저다.